유령작가. 가수나 배우, 연예인, 정치가를 대신해 글을 쓰거나 작사를 하는 이를 일컫는 말이다. 그는 이름도 없고 얼굴도 없다. 우리는 고작 다른 이의 책 혹은 입을 통해서만 그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유령이기에 다른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고, 그래서 때로는 남들이 접근하지 못하는 곳까지 다가갈 수 있는 존재. 영화 <유령작가>는 이 비가시적인 존재인 유령이 이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그리고 이 유령이 어떻게 말하는지 보여주는 영화다.
한 작가(이완 맥그리거)가 영국의 전 총리 아담 랭(피어스 브로스넌)의 자서전 대필을 하게 된다. 원래 자서전을 쓰던 선임자 맥카라가 자살인지 사고인지 모를 사건으로 사망하자, 그의 자리를 메우게 된 것. 그는 런던에서 랭이 머무는 미국으로 건너가 맥카라가 남긴 자서전 초고를 바탕으로 대필 작업에 들어간다. 그 무렵, 랭은 이라크전 당시 테러리스트에 대한 불법 고문 승인과 미국 소환 문제로 궁지에 몰리고, 작가는 선임자가 남긴 자료를 통해 랭의 과거에 다소 미심쩍은 부분이 있음을 발견한다. 랭의 과거를 추적해 가며 작가는 그 중심에 뭔가 거대한 음모가 도사리고 있음을 직감한다.
오래간만에 만나는 거장의 귀환이다. 76세의 노장 로만 폴란스키 감독이 간만에 메가폰을 잡은 <유령작가>는 근래 만나기 어려운 묵직한 정치 스릴러 영화. 소설 『폼페이』로 우리에게 이미 익숙한 작가 로버트 해리스의 원작을 바탕으로 직접 그가 각본까지 참여해 만든 이 영화는, 올해 베를린 국제영화제에서 은곰상을 받으며 일찍이 기대를 모았다. 미국으로 가지 못하는 폴란스키 때문에 미국을 배경으로 하면서도 독일에서 촬영했고, 최종 편집 단계에 스위스에서 체포된 폴란스키 감독이 구금 상태에서 영화를 마무리 지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영화 <유령작가>를 보면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바로 '부시의 푸들'이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해진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다. 실제로 영국 노동당과 토니 블레어의 지지자였던 로버트 해리스는 이라크 파병 문제에 실망해 고의적으로 그를 연상시키게끔 이 작품을 집필했다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아담의 부인 루스 랭(올리비아 윌리암스)는 토니 블레어의 부인 셰리 블레어를 생각나게 하고, 결국 영화의 마지막 출판되는 랭의 자서전 제목은 빌 클린턴의 자서전 제목과 같다. 분명히 이 영화는 실화가 아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현실 속 정치가들을 연상시키는 여러 요소가 한데 모여 관객에게 마치 논픽션과도 같은 착각을 주기 때문에 그 핍진성이 상당하다.
하지만, 그냥 그것뿐이었다면 이 영화는 그저 그런 평범한 정치 풍자영화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영화는 분명히 스릴러를 제대로 만들 줄 아는, 서스펜스가 뭔지 제대로 아는 명실상부한 거장 감독의 영화다. 로만 폴란스키를 잘 모르는 관객일지라도 <유령작가>에 실망할 리 없다는 뜻이다. 절대 낭비하지 않는 대사와 숏, 깔끔한 편집, 그리고 4, 50년대 고전 할리우드 영화를 연상시키는 음악까지. 이 모든 것이 어느 하나 건너뛰는 부분 없이 딱 맞아떨어진다.
우연하게 거대한 음모에 말려들어 간 한 평범한 남자. 주제의식에서 마치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를 연상시키는 이 영화는 고전 스릴러의 느낌을 물씬 풍긴다. 음모를 파헤치는 자와 그런 그를 관찰하는 자. 별것 아닌 것 같은 장면이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반대로 뭔가 일어날 것 같은 지점에서 그 예상이 빗나가는 데서 오는 서스펜스는 영화 내내 이어진다. 거기에 영화가 진행되며 주어지는 단서의 조각들을 하나씩 맞춰가는 과정은 유령 작가와 관객과의 동일시를 불러일으키며 팽팽한 긴장감을 가져온다.
<유령작가>는 음모를 파헤치는 과정을 그리는 동시에 그 음모의 중심을 쉽사리 드러내지 않는다. 손에 잡힐 듯 말 듯한 사건의 전모를 밝히려는 영화의 호흡은 약간의 맥 빠짐도 없이 그 결말까지 호흡을 이어간다. 영화의 마지막에야 드러나는 모든 사건의 전모, 그리고 로우 앵글로 비치는 비밀을 간직한 누군가의 분노와 당혹감으로 가득한 얼굴. 그 끝에 다다르는 순간까지 잠시의 숨 돌릴 틈도 주지 않는 <유령작가>는 근래 개봉한 스릴러 영화 가운데 단연 손꼽을 만한 수작이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흥미로운 부분을 꼽는다면, 이 영화와 로만 폴란스키 감독 자신과의 교차점이다. 몰락하는 영국 총리 아담 랭, 그를 비난하는 수많은 시위대, 정치적 비난과 소송, 그리고 고립. 이 모든 것이 로만 폴란스키 자신의 삶과 흡사하지 않은가. 폴란스키 또한 유령작가가 되어 다른 이의 얼굴과 입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전하는 것은 아닌지. 그의 이야기가 직접 듣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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